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문단 편집) === [[프랑스 침공|프랑스 전역]] === 그가 맡은 A집단군은 [[프랑스 침공]]에서 중앙에 해당했고, 그의 북쪽의 B집단군은 [[페도어 폰 보크]]가 맡아서 [[벨기에]]-[[네덜란드]] [[국경]]에 포진되어 있었고 남부의 C집단군은 [[빌헬름 리터 폰 레프]]가 맡아서 프랑스-독일 국경인 [[마지노 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룬트슈테트의 부하들은 폴란드 전역의 남부집단군에서 그대로 옮겨왔으나 참모장인 만슈타인은 [[군단장]]으로 승진했기 때문에 그 자리는 [[https://en.wikipedia.org/wiki/Georg_von_Sodenstern|게오르크 폰 조덴슈테른]] 중장이 맡았다. 당시 서부에서는 [[가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즉 영프가 선전포고는 했으나 적극적인 교전 행위는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히틀러는 영프의 준비가 안된 11월에 1차 대전의 [[슐리펜 계획]]과 비슷한 공세를 시작하기로 했으나, 독일군 지휘관들은 폴란드 정복 후 부대의 재편성을 위해서 시간을 요구했고, 마침내 공세는 미뤄졌다. 독일군은 [[발트 해]]에 갇힌 [[크릭스마리네]]의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1940년 1월에 [[베저위붕 작전]]을 개시하여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이 동안 독일군 수뇌부는 서부 공세에 대해 격론을 벌였는데, 천재적인 전략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슐리펜 계획을 따라하다가는 1차 대전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판단해, 기갑 부대가 아르덴 숲을 가로질러 프랑스 북부를 침공하는 작전안, 일명 '''[[낫질 작전]]'''을 내놓았고, 룬트슈테트는 이를 적극 지지하여 실행되게 되었다. 1940년 5월, 룬트슈테트가 지휘하는 A집단군은 만슈타인의 작전안을 따라 영프군의 의표를 찔러 대성공을 거두었고, 허를 찔린 영프군은 독일군에 비해 전력이 뒤지지 않았으나 순식간에 무너져 버려 패닉 상태에 이르렀다. 한편 룬트슈테트는 부하들이 세운 작전의 세부 사항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으나, 부하들의 의견 조정에는 큰 힘을 발휘하였다.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을 지휘하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는 자기 지휘 하의 [[하인츠 구데리안]]의 지나친 전진을 우려하여 정지 명령을 내렸으나, 구데리안이 이를 무시하고 계속 전진하자 클라이스트는 구데리안의 지휘권을 박탈하려고 했다. 그러나 룬트슈테트는 [[빌헬름 리스트]]를 통해 이들을 중재하여 구데리안의 지휘권을 유지시켰고 결국 이들은 20만의 영프군을 영불 해협에 가둬놓아 독일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만슈타인 회고록에서 또한 자신의 작전안이 채택되도록 한 것은 룬트슈테트의 공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 공적으로 룬트슈테트는 원수에 이르렀고, 그는 다시 예편하려고 했으나 히틀러는 그가 현역에 있기를 고집했다. 하지만 룬트슈테트가 원수에 임명된 것은 히틀러와의 관계 때문이 크다. [ [[전격전의 전설]] ] 에 의하면 룬트슈테트 지휘하의 A집단군에는 클루게, 리스트, 부슈의 3개 야전군 외에 새로 만들어진 22 "클라이스트" 기갑군이 배속되어 있었다. 그 밑에는 41 "라인하르트" 기갑군단과 19 "구데리안" 기갑군단, 14 "비터스하임" 차량화군단이 배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룬트슈테트의 '지휘하'에 프랑스를 초고속으로 침공하여 영국군, 벨기에군, 프랑스군을 벨기에와 네덜란드 위에 인접한 됭케르크까지 몰아넣게 되었는데, 이때 A집단군 수뇌부와 휘하 기갑부대, 그리고 육군 총사령부와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 간의 의견 충돌이 생겼다. 위에 언급된 폰 클루게의 제4군의 밑에 호트의 15 기갑군 밑에는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던 제7기갑사단이 있었다. 제7기갑사단은 마스 강 도하를 포함하여 급속의 전진을 했던 가장 기동적이던 기갑부대 중 하나였다. 이런 기갑사단과 구데리안과 라인하르트로 대표되던 기갑군단장들은 빠른 진격을 원했다. 그래서 됭케르크에서 ([[됭케르크 철수작전|다이나모 작전]]으로 알려진) 퇴각 작전을 처음부터 무효화하여 포위 공세를 유지하여 섬멸하고자 했다. 이때 영국군, 프랑스군, 벨기에군은 지속된 와해로 전투력이 상실된 상태였다. 하지만 클루게와 룬트슈테트(야전군, 집단군 사령관들)은 히틀러와 그 주위의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의 '간격 좁히기' 계획에 찬성하는 상태였으며 육군 총사령관인 브라우히치 원수는 빠른 진격에 찬성했다. 즉 사단장+군단장+육군 총사령관 vs 야전군/집단군사령관+히틀러 의 구도로 됭케르크를 두고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연히 히틀러는 부하들에게 자신의 고집을 관철 시켰고, 결국 총사령관인 브라우히치가 지휘권을 박탈당해 자신의 '''부하'''인 룬트슈테트 상장에게 진격을 '부탁'하는 처지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의 말에 동의하면서 진격을 허용하지 않았고 따라서 다이나모 작전의 성공을 프랑스군과 영국군에게 '바쳤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히틀러의 꼬인 성격 탓이 있다고 저자인 하인츠 프리저는 분석하고 있다. 원래 만슈타인이 기획하(고 히틀러의 동의를 얻은)였던 지헬슈니트(낫질)작전은 원래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여겼으나 사실은 수뇌부들조차 그 성과를 의심하는 엄청난 승리를 거뒀다. 그러자 히틀러는 이 공이 본인의 것이라고 착각하기에 이르렀고 이제 본인만이 옳다는 독선에 빠졌던 것이다. 그래서 브라우히치와 할더(육군 총사령부의 중심인물들)를 신임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본인의 뜻에 동의하는 룬트슈테트와 마음이 맞았다는 것이다. 할더는 본인의 일기장에 '[[발터 폰 브라우히치|자신의 상관]]이 완전히 기가 죽었다'고 서술했다. 즉 룬트슈테트가 원수에 이르렀다는 것은 어쩌면 히틀러가 본인의 실수(다이나모 작전을 방관한 것)를 합리화하고, A 집단군의 마지막 실책을 인정하기 싫어서 미방책을 만든 결과에 지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